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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다스리기

마인드텔링

by 마무리멘트 2019. 12.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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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씨는 40이 다 되어가는 청년입니다.

부모님은 동석씨가 아주 어린시절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키워주신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부부싸움을 하다가 집을 나가버린 엄마 성질이 고약했다고 합니다. 순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아버지는 여기저기 지방으로 돈벌이를 다니느라 일년에 몇 번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동석씨는 할머니 손에서 크면서 흔한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착하게 자랐습니다.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고, 군대를 다녀와서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10년 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동창회도 종종 나가고 여자친구를 몇번 사귀기는 했지만, 어쩌다보니 아직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클리닉에 오신 날은 이랬습니다. 특별히 우울하거나 잠을 잘 못 자는 건 아닙니다. 정규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기술관련 업무를 하면서 일도 손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전문가 수준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울컥 화가 나서 주변에 막 화를 내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회사의 과장님이나 윗 분들이 평소에는 잘 해주는데, 원청업체에서 클레임이 오거나 사장님에게 혼나고 나면 그 화풀이를 다 본인에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알고보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대충 일을 했던 탓이거나 혹은 원래 주문 자체가 그런 경우가 많은데, 본인을 희생양 삼는 것 같아서 억울합니다. 또 당하고 나면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뭐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술이라도 먹으면서 풀수 있으면 좋겠는데, 워낙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인 것도 억울합니다. TV를 보다가 이런 본인이 혹시 분노조절장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동석씨의 이런 상태는 “울분 鬱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본인의 성향이나 체질, 성격 등에 따라서 우울증이나 불안증이 생기기도 하지만, 두통이나 불면증, 통증 같은 신경성 신체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중에 지속적으로 실망하고 실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내가 박해를 받고 피해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나 조직에 뭔가 복수를 하면 시원할 것 같은데,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울분”이라 합니다.

 

울분은 흔히 사회적 불공정함과 뭔가 정의롭지 못한 느낌에 의해 생긴다고 하고, 만성실직이나 만성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에 잘 나타납니다.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출신의 노동자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다 합니다.

가난하던 공산주의 시절에 비해 통일이 되고나서 임금은 올랐지만, 일을 한 정도에 따라 임금격차도 심해지고 몸이 아픈데, 정부기관에서 직업 관련성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디 호소할 곳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지만, 딱히 우울증은 아닌데, 울화병처럼 화에 가득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긴겁니다.

 

독일 베를린의 마이클 린든 교수는 이런 분들이 겪는 증상을 울분 (embitterment)이라고 불렀고, 울분장애라는 진단명을 주장했습니다. 중증 우울증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돌봐야 하는 정신질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재 판정을 기다리는 분들 중에 울분 증상일 것 같은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 상태는 한민족 문화속에 녹아있는 “한 恨”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한이라는 것은 못내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오랜시간 마음속에 쌓여서 마치 돌덩이처럼 가슴속에 맺혀버린 감정으로서 폭발하거나 누군가를 해치는 경우까지 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복수보다는 포기의 개념이 더 많은거죠. 화병은 그 한이 오랜시간 뭉쳐서 가슴속에 뭉친 덩어리같은 신경성 신체증상으로 주로 나타나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정신질환입니다.

 

하지만, 울분의 감정은 보다 인류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그 억울한 감정은 속으로 쌓이다가 내부적으로 터져서 우울증이나 스스로를 해치기도 하고, 반대로 외부로 폭발해서 누군가를 해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하철 방화사건이나 묻지마 폭력사건 같은 경우에 그 예를 짐작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울분의 원인들로 흔히 인재라 불리는 재난사고들과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사회의 고령화, 또는 정치적 부패등에 따른 불공정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울분장애가 의심되는 분들의 특징으로 울분, 분노감, 그리고 무기력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과 울분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아서 흘려보낼 수는 있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거나" "용서를 하지 않으면" 이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울분장애는 우울증이나 불안증상에 비해 약물로 잘 치료되지 않습니다.

 

동석씨는 몇 달간 클리닉에 다니면서 욱하는 마음, 옆 동료에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가끔 방문해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갑니다.

심각한 분노의 충동이나 신체적 불안증상은 적절한 약물치료로 좋아지지만, 심리적으로 마음속에 남아있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은 더 오랜시간 심리적인 치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나 동석씨가 동의한 것이 있습니다. 모두 결국은 마음을 보듬어서 상처입는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게 하고, 그 마음이 성숙해지고 성장하도록 돕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참선이나 묵상을 하는 것과도 비슷할 것입니다.